[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 분단체제 속 폭력의 기억, 일상에 스며든 혐오의 언어
기자말
2026년 3월 27-29일간 DMZ와 파주 인근에서 열릴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은 전쟁과 분단, 혐오와 차별,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연속 기고 '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는 분단과 경계,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라는 다섯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이 경유해 온 고통의 역사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인천 중구생활사전시관에 있는 멸공방첩 간첩신고는 113 112 ⓒ 연합뉴스
'멸공'이란 말이 곳곳에서 활개 치고 있다. 한 대기업 부회장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경례 구호처럼 멸공을 쓰기도 했고, 지난해 혐중 시위에서는 대학생들이 '멸공'을 외쳤다. 급기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한 초등학생이 썼다는 편지에는 '일거에 척결' '멸공' 같은 험상궂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고 등장하고, 분식 프랜차이즈로 유명한 기업에서는 '멸공떡볶이'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멸공'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의 멸공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기호이다. 그들의 멸공은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멸공이 지시하는 대상이 북한과 중국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이 적대시하는 북한과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중국이 아니다.
복잡한 국제질서와 남한 당국과의 외교적 관계 속에 놓인 북한과 중국의 정치적 환경 따위는 그들의 멸공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북한과 중국이라는 하나의 가상이 그들의 멸공이라는 말에는 작동하고 있다. 그들이 멸공은 추상적인 그물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그 그물에 걸려들면 그들이 정한 가상의 적과 동일시해 혐오와 배제, 차별의 대상으로 낙인찍으며 폭력적 공격의 표적으로 삼는다.
이런 방식으로 유통되는 멸공이라는 말은 파시즘적 언어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파시즘적 언어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빈곤과 과장'이다. 나치 치하에서 저술한 빅토르 클램페러의 저작 <LTI, 제3제국어, 한 문학학자의 수첩>과 <일기>를 분석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끝까지 증언하는 사람>에 따르면, 빈곤은 "왜냐고 없음"이고 "여지 없음"이다.
이 없음은 물론 전체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허용되지 않는 없음이지만 이 없음에는 논리 없음, 근거 없음, 맥락 없음을 포함한다. 이 없음이 언어의 빈곤을 낳고 이 언어의 빈곤이 도리어 최상급이라는 과장을 만들어낸다. 멸공은 반공의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들은 인간성을 기계화, 사물화한다. '멸'의 대상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글자의 실체
멸공이 처음으로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엔 저수지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저수지 둑으로 몰려가 멱을 감거나 둑 위로 자란 풀숲을 헤집으며 개구리를 잡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인가 수리조합에서 저수지 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았다. 아이들 키까지 자랐던 풀들은 모두 타고 그 자리에 까맣게 재만 남았다. 그 까만 재 사이로 돌 글씨가 나타났는데, '멸공방첩'이었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우리 집보다 컸다. 사실 그 글자는 워낙 커서 가까이서는 알기 어려웠다. 읍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면서야 비로소 그 거대한 글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6.25 표어나 포스터 등을 통해 정확히는 몰라도 멸공이란 말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버스 안에서 까만 재 위로 나타난 그 글자들을 본 순간 뻔하디뻔한 반공 교육의 내용과는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내게 밀어닥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소름이 돋아 경기하듯 몸을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때 그 공포의 실체를 조금이나 확인할 수 있었다. 저수지에 수몰된 마을은, 어른들 말로는, "인공 때 해방구"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인 그곳은 군경이 섣불리 통제하지 못했는지 전쟁 이후까지 빨치산이 출몰하였다고 했다(저수지 맨 안쪽 마을 지나면 전라남도 장성으로 이어지는 싸리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가 빨치산들에게 유명한 고개였다는 말을 몇 년 전에 소설가 정지아 선배로부터 들었다).
그 사실은 어른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말을 꺼내는 것은 금기였다. 나도 할아버지께 꼬치꼬치 캐물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세 물길이 만나는 마을이라 아랫마을에 농업용수가 부족할 일이 없는데도 그곳에 저수지를 막았다고 했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전쟁 이후 그곳에 출몰하는 빨치산들을 모두 토벌하고 나서였다. 저수지를 건설함으로써 역사의 흔적과 기억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자리에 보란 듯이, 토벌의 공포를 언제까지고 되새기라는 듯이 '멸공방첩'을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마을 어귀에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데다 키가 낮아서 아이들이 매일 말을 타듯 올라가 놀던 허옇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던 그 비석에는 '토벌대장 ○○○ 기념비'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로부터 내게는 외종조부가 되는 외할아버지의 동생이 면인민위원장을 하다가 월북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남한에 남은 외종조모는 고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도 들었다. 마을 이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낮에는 군경에게 밥을 대접하고 밤에는 빨치산들에게 밥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도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이다.
최근 나는 전쟁 중에 외갓집 주변 지역과 고창 지역 일대에서 11사단에 의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확인된 희생자 수만 273명에 이른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생존을 위한 행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절했던 것이다.
내 친할아버지의 동생 즉 종조부는 국방군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발굴 중이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나와 내 가계와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분단의 비극적 상황에서 생존한 자들의 후손인 셈이다. 내 몸에 이렇게 운명처럼 분단이 분단의 비극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멸공' 때문에 새삼 환기하게 되었다. 멸공이란 말을 들으면 이제는 현재의 일상과는 무관하게만 생각되었던 끔찍한 공포도 함께 되살아난다.
미래를 위해 지금-여기서 필요한 일
멸공이라는 말이 파시즘의 언어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은 남한의 분단체제(백낙청)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알다시피 남한의 정치권력은 식민지 기득권을 기반으로 출발했다. 파시즘 역시 식민지의 유산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남한의 우파 정권들이 식민지적 파시즘을 더욱 공고히 하고 정권 유지에 활용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한반도의 분단 때문이다.
분단 상황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사의 그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단이라는 상황을 명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민주주의의 열망을 탄압하고 공포를 확산시켜 왔다. 멸공 같은 파시즘적 언어는 그러한 공포를 내면화하고 민중들을 침묵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단체제를 노골화한 괴물이 바로 윤석열 정권이었다. 그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낡은 언어를 정권 내내 호명했으며 급기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끔찍한 것은 그가 북한을 자극해 국지전을 일으키려고 했고 이를 명분으로 그가 반국가 세력이라고 낙인찍은 국민들을 학살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멸공'이 실행될 뻔했던 것이다.
젊은 극우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유통되는 멸공은 당연하게도 이런 위험성을 잠재하고 있다. 스스로 희화화하기도 하거니와 시민사회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이 멸공이라는 말은 기회와 권력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멸공이라는 이름하에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이 윤석열의 예에서처럼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다.
김남주의 시처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안팎에서 발생하는 모든 모순 속에 삼팔선은, 분단은 있다. '멸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무관심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그대 가슴에도" 또 내 가슴에도 있다. 언어를 다루는 자로서 나는 이 '멸공'을 그것이 상징하는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분단과 파시즘적 폭력으로 점철된 이 헛소리에 맞서는 '헛소리(김수영)'들이 시급하게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헛소리'들이 멸공 같은 헛소리들의 내용과 맥락을 드러내고 다른 상상력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우리 미래를 위해 지금-여기서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열리는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이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계의 수많은 '헛소리'들의 연대가 이루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근 시인입니다.
김근 | 시인.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에게서 에게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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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 분단체제 속 폭력의 기억, 일상에 스며든 혐오의 언어
기자말
2026년 3월 27-29일간 DMZ와 파주 인근에서 열릴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은 전쟁과 분단, 혐오와 차별,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연속 기고 '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는 분단과 경계,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라는 다섯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이 경유해 온 고통의 역사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인천 중구생활사전시관에 있는 멸공방첩 간첩신고는 113 112 ⓒ 연합뉴스
'멸공'이란 말이 곳곳에서 활개 치고 있다. 한 대기업 부회장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경례 구호처럼 멸공을 쓰기도 했고, 지난해 혐중 시위에서는 대학생들이 '멸공'을 외쳤다. 급기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한 초등학생이 썼다는 편지에는 '일거에 척결' '멸공' 같은 험상궂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고 등장하고, 분식 프랜차이즈로 유명한 기업에서는 '멸공떡볶이'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멸공'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의 멸공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기호이다. 그들의 멸공은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멸공이 지시하는 대상이 북한과 중국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이 적대시하는 북한과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중국이 아니다.
복잡한 국제질서와 남한 당국과의 외교적 관계 속에 놓인 북한과 중국의 정치적 환경 따위는 그들의 멸공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북한과 중국이라는 하나의 가상이 그들의 멸공이라는 말에는 작동하고 있다. 그들이 멸공은 추상적인 그물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그 그물에 걸려들면 그들이 정한 가상의 적과 동일시해 혐오와 배제, 차별의 대상으로 낙인찍으며 폭력적 공격의 표적으로 삼는다.
이런 방식으로 유통되는 멸공이라는 말은 파시즘적 언어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파시즘적 언어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빈곤과 과장'이다. 나치 치하에서 저술한 빅토르 클램페러의 저작 <LTI, 제3제국어, 한 문학학자의 수첩>과 <일기>를 분석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끝까지 증언하는 사람>에 따르면, 빈곤은 "왜냐고 없음"이고 "여지 없음"이다.
이 없음은 물론 전체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허용되지 않는 없음이지만 이 없음에는 논리 없음, 근거 없음, 맥락 없음을 포함한다. 이 없음이 언어의 빈곤을 낳고 이 언어의 빈곤이 도리어 최상급이라는 과장을 만들어낸다. 멸공은 반공의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들은 인간성을 기계화, 사물화한다. '멸'의 대상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글자의 실체
멸공이 처음으로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엔 저수지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저수지 둑으로 몰려가 멱을 감거나 둑 위로 자란 풀숲을 헤집으며 개구리를 잡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인가 수리조합에서 저수지 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았다. 아이들 키까지 자랐던 풀들은 모두 타고 그 자리에 까맣게 재만 남았다. 그 까만 재 사이로 돌 글씨가 나타났는데, '멸공방첩'이었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우리 집보다 컸다. 사실 그 글자는 워낙 커서 가까이서는 알기 어려웠다. 읍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면서야 비로소 그 거대한 글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6.25 표어나 포스터 등을 통해 정확히는 몰라도 멸공이란 말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버스 안에서 까만 재 위로 나타난 그 글자들을 본 순간 뻔하디뻔한 반공 교육의 내용과는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내게 밀어닥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소름이 돋아 경기하듯 몸을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때 그 공포의 실체를 조금이나 확인할 수 있었다. 저수지에 수몰된 마을은, 어른들 말로는, "인공 때 해방구"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인 그곳은 군경이 섣불리 통제하지 못했는지 전쟁 이후까지 빨치산이 출몰하였다고 했다(저수지 맨 안쪽 마을 지나면 전라남도 장성으로 이어지는 싸리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가 빨치산들에게 유명한 고개였다는 말을 몇 년 전에 소설가 정지아 선배로부터 들었다).
그 사실은 어른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말을 꺼내는 것은 금기였다. 나도 할아버지께 꼬치꼬치 캐물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세 물길이 만나는 마을이라 아랫마을에 농업용수가 부족할 일이 없는데도 그곳에 저수지를 막았다고 했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전쟁 이후 그곳에 출몰하는 빨치산들을 모두 토벌하고 나서였다. 저수지를 건설함으로써 역사의 흔적과 기억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자리에 보란 듯이, 토벌의 공포를 언제까지고 되새기라는 듯이 '멸공방첩'을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마을 어귀에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데다 키가 낮아서 아이들이 매일 말을 타듯 올라가 놀던 허옇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던 그 비석에는 '토벌대장 ○○○ 기념비'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로부터 내게는 외종조부가 되는 외할아버지의 동생이 면인민위원장을 하다가 월북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남한에 남은 외종조모는 고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도 들었다. 마을 이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낮에는 군경에게 밥을 대접하고 밤에는 빨치산들에게 밥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도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이다.
최근 나는 전쟁 중에 외갓집 주변 지역과 고창 지역 일대에서 11사단에 의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확인된 희생자 수만 273명에 이른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생존을 위한 행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절했던 것이다.
내 친할아버지의 동생 즉 종조부는 국방군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발굴 중이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나와 내 가계와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분단의 비극적 상황에서 생존한 자들의 후손인 셈이다. 내 몸에 이렇게 운명처럼 분단이 분단의 비극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멸공' 때문에 새삼 환기하게 되었다. 멸공이란 말을 들으면 이제는 현재의 일상과는 무관하게만 생각되었던 끔찍한 공포도 함께 되살아난다.
미래를 위해 지금-여기서 필요한 일
멸공이라는 말이 파시즘의 언어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은 남한의 분단체제(백낙청)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알다시피 남한의 정치권력은 식민지 기득권을 기반으로 출발했다. 파시즘 역시 식민지의 유산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남한의 우파 정권들이 식민지적 파시즘을 더욱 공고히 하고 정권 유지에 활용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한반도의 분단 때문이다.
분단 상황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사의 그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단이라는 상황을 명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민주주의의 열망을 탄압하고 공포를 확산시켜 왔다. 멸공 같은 파시즘적 언어는 그러한 공포를 내면화하고 민중들을 침묵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단체제를 노골화한 괴물이 바로 윤석열 정권이었다. 그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낡은 언어를 정권 내내 호명했으며 급기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끔찍한 것은 그가 북한을 자극해 국지전을 일으키려고 했고 이를 명분으로 그가 반국가 세력이라고 낙인찍은 국민들을 학살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멸공'이 실행될 뻔했던 것이다.
젊은 극우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유통되는 멸공은 당연하게도 이런 위험성을 잠재하고 있다. 스스로 희화화하기도 하거니와 시민사회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이 멸공이라는 말은 기회와 권력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멸공이라는 이름하에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이 윤석열의 예에서처럼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다.
김남주의 시처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안팎에서 발생하는 모든 모순 속에 삼팔선은, 분단은 있다. '멸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무관심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그대 가슴에도" 또 내 가슴에도 있다. 언어를 다루는 자로서 나는 이 '멸공'을 그것이 상징하는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분단과 파시즘적 폭력으로 점철된 이 헛소리에 맞서는 '헛소리(김수영)'들이 시급하게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헛소리'들이 멸공 같은 헛소리들의 내용과 맥락을 드러내고 다른 상상력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우리 미래를 위해 지금-여기서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열리는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이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계의 수많은 '헛소리'들의 연대가 이루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근 시인입니다.
김근 | 시인.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에게서 에게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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